동행칼럼

'부자의 품격' 노블레스 오블리주 - 백산 안희제 [安熙濟]

제목 :
'부자의 품격' 노블레스 오블리주 - 백산 안희제 [安熙濟]
등록일시 :
2023-07-24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95

<부자의 품격> 노블레스 오블리주 – 백산 안희제 [安熙濟] -
백산상회를 세워 독립운동 거점으로 독립자금을 조달한 독립운동가
나라가 망해가는데 선비는 어디에 쓰일 것인가?
민족교육운동과 국권회복운동을 주도한 선각자

 

■ 사업의 성공이 독립운동
백산 안희제는 백산상회(白山商會) 회사를 설립하여 독특한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했다. 그는 이 회사의 영업망을 독립운동을 위한 연락망으로 활용하였으며, 이 회사를 통해 자금을 모아 임시정부로 보내기도 하였다. 그가 세운 백산상회는 당시 임시정부의 손꼽히는 자금줄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이밖에도 다양한 사회활동과 언론활동으로 민족운동을 했다. 1930년대에 만주로 건너가 발해농장과 발해학교를 세워 이를 독립운동을 위한 기지로 일구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일제가 자행한 대대적인 탄압에 휘말려 안타깝게도 순교(殉敎)한 탁월한 사업가이자 애국지사다. 

 

■ 경상도에서 올라온 우국 청년
안희제는 1885년 경상남도 의령에서 태어나 보성전문학교, 양정의숙 경제과를 졸업한 후 고향에 내려와 학교설립운동을 벌였다. 신민회(新民會) 계열 영남지역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단체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에도 참여하였다. 항일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치기 위해 비밀결사의 형태로 운영되었다. 훗날 백산상회에 관련된 인사가 많았다. 임시정부의 초대 법무차장이었던 남형우와 재무차장이었던 윤현진(尹顯振)도 이 단체의 구성원이었다.
“나라가 망해가는데 선비는 어디에 쓰일 것인가?”그의 뜨거운 가슴에 품고 살았다. 

 

■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다
안희제는 나라가 망하자 1911년 조국을 떠나 만주와 시베리아 일대를 유랑하며 국제 정세를 살피고 여러 독립운동 지도자를 만나며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하였다. 1914년 9월 부산으로 귀국하여 부산에서 곡물, 면화, 해산물 등을 거래하는 무역회사 백산상회를 설립하였다. 이는 사업을 통한 독립운동 자금을 안정적으로 마련하고, 이 회사의 영업망을 독립운동을 위한 네트워크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백산상회는 겉으로는 작은 상점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여러 독립운동가의 회의실, 독립자금을 임시정부로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등 국내 중요 독립운동 기지의 역할을 하였다.

 

■ 사업가로 독립운동에 뛰어들다
안희제는 1919년 3·1 운동 이후 백산상회를 통한 독립운동을 확대하였고, 1919년 5월 백산상회를 투자 유치하기 위해 주식회사로 확대 개편하여 백산무역주식회사로 변경하였고 안희제·최준(崔浚)·윤현태(尹顯泰) 세 사람이 발기에 참여하여 자본금 100만원(현재 약400억)을 모아 출범할 수 있었다. 최준은 경주의 최부자로 알려진 인물이며, 윤현태는 대지주의 장남으로 그의 아우인 윤현진은 임시정부의 재무차장을 지냈다. 주주들 대부분은 영남지역의 대지주들이었다. 
백산무역주식회사는 설립 당시 상당한 투자금을 모았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갈수록 결손이 커져만 갔다. 결손이 늘어난 것은 부실한 경영 때문은 아니었다. 회사의 자금이 임시정부로 빠져나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주주들은 안희제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기에 결손이 생길 때마다 추가로 자금을 납입하여 위기를 막아 주었다.
일화에 의하면 경주 최 부잣집의 최준도 백산상회를 통해 임시정부에 자금을 전달했는데, 안희제에게 전달한 막대한 돈 중 경비로는 한 푼도 쓰지 않고 임시정부에 전액 그대로 전달되어 그의 청렴함과 개인의 부나 명예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한 헌신에 울림과 감동을 주었다. 
그러나 백산무역주식회사는 계속된 독립운동자금 공급과 부채, 일제의 수색, 장부검열 및 회사 간부에 대한 감금·고문 등의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1927년 해산되고 말았다.

 

■ 만주 발해농장을 개척하다
안희제는 1930년대 발해의 고도인 영안현 동경성에 발해농장을 개척하여 이를 거점으로 새로운 방식의 독립운동을 시도하였다. 백산무역이 1927년 해산하고 『중외일보』가 1931년 발행을 중단함에 따라 그에게는 새로운 활동무대로 떠오른 곳이 바로 만주였다. 
발해농장을 경영하면서 자작농창제(自作農創制)를 시행하였다. 이 제도는 이주 농민에게 농장 소유 토지를 분배한 후 분배된 토지에서 소작료를 거두는 대신 일정 기간 다른 토지를 개간하고 수로를 개설하도록 하는 제도이다. 한편으로는 자작농을 육성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발해농장도 확장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발해농장에 발해학교를 설립하여 이주농민의 2세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를 통해 이주 한인들의 경제적 기반을 안정시킴으로써 이를 독립운동의 기지로 삼아 민족교육운동과 국권회복운동을 주도하였다.

[발해농장 안에 학교를 세워 농민들과 자녀들에게 민족 교육을 했다]

 

■ 임오교변으로 순국
일제는 1942년 하반기에 들어서면 태평양전쟁의 전세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더욱 예민해져서 조선인에 대해 무차별적인 탄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42년 10월에 발생한 조선어학회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임오교변이 일어났다. 모두 25명이 잡혀 들어가 모진 고문을 받다가 그 가운데 열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안희제도 이때 잔혹한 고문을 받고 9개월 만에 병보석에서 풀려났지만, 1943년 8월 3일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생각하다
나라가 망해가는데 선비는 어디에 쓰일 것인가? 민족교육운동과 국권회복운동을 주도한 선각자 백산 안희제 선생의 의를 위한 싸움과 그 기백 앞에 옷깃이 여미어진다. 
뛰어난 통찰력과 탁월한 처세술로 개인의 부나 명예를 얼마든지 쌓아 누릴 수도 있었지만, 나라를 잃은 통한을 자신의 재능으로 백산상회를 세워 독립운동 거점으로 내어놓고, 뜨거운 헌신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한 막대한 독립자금을 조달한 그의 희생은 위대한 사업가를 뛰어넘어 위대한 독립운동가로 오늘의 우리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생각하게 한다.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두산백과, 우리역사넷,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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