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칼럼

'부자의 품격' 노블레스 오블리주 - 경주 최부잣집

제목 :
'부자의 품격' 노블레스 오블리주 - 경주 최부잣집
등록일시 :
2021-07-19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877

 

 

500년이 지나도 존경받는 부자

12300년 부의 비밀 - 6가지 가훈(六訓)

협력으로 일으킨 부 - 상생과 협력의 모범

자선사업과 독립운동, 교육에도 거액기부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

 

'경주 최 부잣집'은 조선시대 청백리 최진립 장군이 시조인 경주 최씨 가문으로 17세기 초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약 300년간 12대로 대대손손 가훈을 지켜가며 큰 부를 이어왔고, 어려운 이들의 아픔을 돌보며 나그네와 거지들에게도 돈을 나누어 주고 밥을 먹여주는 선행을 하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명문 가문이다.

 

 

나라에 세운 공으로 부자가 되다 - ‘1대 최진립

 

최부잣집의 시조인 최진립 장군은 임진왜란 때 참전하고 정유재란 때에도 공을 세웠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위도총부도사, 공조 참판, 삼도 수군통제사 등의 관직을 지내며 나라에 공을 세운 청백리로 그 공으로써 나라에서 보상받은 재산으로 부자 가문의 기틀을 세웠다. 그는 아들 최동량에게 교육을 잘 시켜 재산을 물려주고 최부잣집 가문으로 발전시키는 데 초석이 되었고, 편한 여생을 살수도 있었지만 1636년 병자호란 때 나라를 위해 참전했다가 전장에서 전사한 강직했던 인물이다.

 

 

협력으로 일으킨 부

‘혼자서 잘살아서 무엇하랴’ ‘2대 최동량’

 

‘2대 최동량은 경주 최부잣집을 명실상부한 만석꾼 부자로 만든 인물이다. 그 이전까지 이 집안은 경주 시골마을의 작은 부자에 불과했다. 더욱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대 전란을 거치면서 이 집안의 삶의 터전이었던 경주 이조리 마을은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이러한 폐허 속에서 최 부잣집을 만석꾼으로 탈바꿈시켰다.

 

최동량은 더불어 일하고 일한 만큼 나누어 갖는다는 최 부잣집의 경영 원칙을 세웠다. 산에서 강에 이르는 큰 땅을 사서 둑을 세우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땅을 쓰고 싶어 하면, 소작료 반분작(소작료 5)을 시행했다. 이는 당시 소작인에게 소작을 주고 8~9할을 거둬가던 시절이었기에 파격적인 것이며, 또한 지주와의 사이에서 소작료를 빼돌리며 횡포가 심했던 중간 관리자인 마름을 두지 않고 지주가 직접 수확한 곡식의 반만 받고 일꾼을 모아 그 큰 땅을 모두 일구었다. 그런데 소작료를 반으로 줄였는데 수입이 줄기는커녕 오히려 더 부자가 되었다. 당시는 땅이 매물로 나와도 사람을 통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었던 때였기에 언제부턴가 지역 일대의 소작농들이 경쟁하듯이 달려와 어디에 논 매물이 나왔으니, 최 부자께서 사주세요라고 알려줬고, 최 부자의 논이 늘어날수록 소작인들은 자신에게 이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농사는 성공적이었고, 거름을 쓰는 시비법과 모내기를 하는 이앙법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수확량을 크게 늘리며 지주와 소작농, 일꾼이 협력하여 함께 잘사는 길을 열어가며 이 가문은 큰 부를 이루며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최부잣집 땅을 안 밟고는 경주 일대를 지날 수 없다는 말이 이때 나온 것이다.

 

이후에도 일꾼과 노비를 인간적으로 대접하고 가족처럼 사랑하는 최 부잣집의 가풍은 면면히 전승되었다. 최 부잣집은 노비에 대한 차별 철폐에도 앞장서 100명에 이르는 노비들의 문서를 직접 불살라버리기까지 했다. 당시 노비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인정 많고 인심 후한 최부잣집을 떠나려하지 않았고, 최 부잣집은 남은 노비들에게 그들이 일한 만큼 임금을 지급했다. 나눔과 상생, 믿음과 감동으로 지주-소작농-일꾼과 노비 모두 -(win-win)’ 하는 상생과 협력의 모범이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 ‘3대 최국선

 

조선 최고의 부자가 된 최동량의 뒤를 이은 ‘3대 최국선때부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나눔이 시작되었다. 최국선은 1671년 조선 현종 때에 흉년이 들어 농민들이 빌려 간 쌀을 못 갚게 되자 안타까워하며 아들 최의기 앞에서 채권 담보문서를 모두 불살랐고, 죽을 쑤어 거지들에게 푸짐하게 나눠주고, 보리가 여물지 않은 3월과 4월의 보릿고개엔 100석의 쌀을 굶주린 이웃에게 나눠주었다. 또한 소작 수입의 1/3을 빈민구제로 베풀었으며 이는 200년 후인 최준 대에까지 이어졌다.

 

재물은 똥거름과 같아서 움켜쥐면 썩고 한곳에 모아두면 악취가 나서 견딜 수가 없지만 골고루 흩뿌리면 거름이 되어 세상을 이롭게 한다

 

최부자 가문은 베푸는 데 인색함이 없었다. 흉년이 들면 동네 어구에 활인서(조선시대 빈민구호기관)을 지어 커다란 가마솥 여러 개를 두고 죽을 끓여 빈민들을 구제하며 곳간을 열어 쌀을 나눠주기도 했고, 겨울에는 옷을 지어 추위로 죽는 사람이 없도록 했다. 19세기 조정의 부패와 일본에 의해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11대 최현식은 활빈당에 의해 최부잣집의 도움을 받았던 수많은 농민과 거지들이 스스로 일어나 활빈당을 물리쳐 무사히 대가 이어졌다.

 

 

가치 있는 일을 위해 300년 부를 바치다 독립운동과 학교설립 ‘12대 최준

 

1910년 일제의 침략으로 한일합병조약에 따라 국권이 상실되어 일제강점기가 되자 ‘12대 최부자 최준은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세워 안희제와 운영하며 임시정부 재정부장을 맡아 독립운동의 자금 담당 역할을 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을 했다. 또한 광복 이후에는 전 재산을 모두 털어 대구대학(현 영남대학교)과 계림학숙을 세웠다.

 

경주 최 부잣집은 무려 12300년 동안 만석꾼의 지위와 명성을 유지한 최장수 부자였다. 그토록 오랜 세월 부를 유지한 비결은 집안을 다스리는 가훈인 육훈(六訓)’과 자신을 다스리는 처세법인 육연(六然)’을 대를 이어 전승하며 실천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후손을 엄격하게 교훈하며 탐욕을 줄여갔던 최부잣집의 가풍은 500년이 지나도 존경받는 부자, 12300년에 걸친 부의 비결, 상생과 협력으로 일으킨 부의 모범, 어려운 이웃을 배려하는 자선사업, 나라의 미래를 위한 독립운동과 거액의 교육 기부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부자의 품격으로 세상의 존경을 받으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글_김태수 아름다운동행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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